WHO 팬데믹 협상 지연, 한국 백신 안보 흔든다

2021년 초, 코로나19(COVID-19) 백신이 처음 보급되던 시절을 떠올려 보면,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접종 시작이 늦었고 물량 확보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국민들은 접종 시기를 알 수 없어 불안에 떨었고, 정부는 해외 제약사와의 계약 조건을 공개하지도 못한 채 눈치를 살펴야 했다. 그 경험은 단순한 행정 실패가 아니었다.

 

국제 보건 체계의 구조적 불평등이 한국인의 팔뚝에 직접 꽂힌 사건이었다. 그런데 5년이 지난 2026년 현재, 세계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위기에 처해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회원국들은 2025년 5월 세계보건총회(WHA)에서 채택된 팬데믹 협정의 핵심 부속서인 '병원체 접근 및 이익 공유(Pathogen Access and Benefit-Sharing, PABS)' 협상을 최종 타결하지 못한 채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PABS 부속서는 팬데믹 가능성이 있는 병원체와 그 유전 정보를 국제적으로 투명하게 공유하고, 이를 토대로 개발된 백신·치료제·진단키트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마디로, 다음 팬데믹이 왔을 때 가난한 나라도 백신을 제때 맞을 수 있도록 규칙을 미리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규칙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협상 지연은 단순한 외교적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다음 팬데믹에서 누가 백신을 제때 맞고 누가 그러지 못하는지를 결정하는 구조적 문제다.

 

PABS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진 핵심 원인은 세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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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병원체에 대한 접근권 문제다. 개발도상국들은 자국 영토에서 발생한 바이러스 샘플을 WHO 또는 국제 연구기관에 제공할 경우, 그 병원체를 기반으로 개발된 의약품의 혜택을 자국민이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선진국과 그 제약사들은 병원체 공유를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해야 대응 속도를 높일 수 있다며, 사전에 복잡한 이익 배분 조건을 달면 실제 위기 때 정보 공유가 늦어진다고 맞선다.

 

이 논리는 표면상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2009년 인플루엔자(influenza) 대유행 때 인도네시아가 바이러스 샘플을 공유했다가 정작 백신 접근에서 소외된 역사적 선례를 망각한 주장이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항의는 이후 WHO의 '대유행 인플루엔자 대비 체계(PIP Framework)' 논의의 출발점이 되었지만, 샘플은 세계로 나갔어도 백신은 구매력 있는 나라로만 돌아간 구조는 반복되었다. 둘째, 개발도상국에 대한 백신 접근 보장 문제다.

 

PABS 부속서는 팬데믹 발생 시 백신 생산량의 일정 비율을 저소득 및 중소득 국가에 우선 배분하는 의무를 제약사에 부과하는 조항을 검토했다. 그러나 글로벌 제약사들은 이 조항이 지식재산권(IP, Intellectual Property) 체계와 충돌하며 연구개발 투자 유인을 약화시킨다고 반발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고소득 국가들이 전체 백신 물량의 절반 이상을 선점한 반면, 아프리카 대륙의 접종률은 유럽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WHO와 아워월드인데이터(Our World in Data) 등 국제 보건 통계 기관들이 공통으로 확인한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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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균형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구속력 있는 배분 의무 조항이 필요하지만, 그 의무를 부담할 주체들이 협상장에서 버티고 있다. 셋째, 제약 회사의 재정적 기여 문제다. PABS 시스템이 작동하려면 병원체 정보를 공유한 국가가 이익을 실질적으로 받을 수 있는 재정 흐름이 구축되어야 한다.

 

WHO는 제약사가 PABS 시스템을 통해 병원체 정보를 활용해 개발한 제품에서 일정 비율의 수익을 기여금으로 납부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그러나 제약사들은 그 비율과 조건을 두고 격렬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협상은 기술적 세부 사항이 아니라 이익의 분배 원칙 자체를 둘러싼 싸움이 되었고, 2025년 5월 WHA 시점에 PABS는 합의 없이 남겨진 채 팬데믹 협정이 먼저 채택되는 이례적인 상황이 빚어졌다.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Tedros Adhanom Ghebreyesus) WHO 사무총장은 협상 과정에서 진전이 있었다고 평가하면서도 강하게 경고했다. "다음 팬데믹은 '안 올지'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올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발언은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WHO 산하 정부간 협상단(IGWG)은 2026년 7월 6일부터 17일까지 7차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며, 최종 합의 시한은 2026년 특별 총회 혹은 2027년 5월 차기 WHA까지 연장될 수 있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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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낙관적인 시나리오에서도 PABS 부속서가 발효되기까지 최소 1년 이상이 더 걸린다는 의미다. 그사이에 새로운 병원체가 등장한다면, 세계는 또다시 즉흥 대응에 기댈 수밖에 없다. 전 뉴질랜드 총리이자 UNDP 전 총재, 코로나19 대응 독립패널(IPPPR) 공동의장을 지낸 헬렌 클라크(Helen Clark)는 합의 불발에 깊은 유감을 표명하며, 세계가 팬데믹에 "크게 대비되지 않은(largely unprepared)" 상태라고 경고했다.

 

글로벌 보건 형평성 문제를 오랫동안 다뤄온 그의 발언은 현 상황을 정확하게 짚은 것이다. 팬데믹 협정은 채택되었지만, 그 협정을 실제로 작동시키는 핵심 부속서가 빠진 상태다.

 

엔진 없는 자동차를 만들어 놓고 완성차라고 부를 수 없듯, PABS 없는 팬데믹 협정은 위기 앞에서 무력한 문서에 불과하다. 일부에서는 PABS 협상의 지연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주권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다자 협상에서 속도보다 완성도가 중요하다는 논리다. 제약사의 지식재산권을 무시한 채 이익 배분을 강제하면 오히려 민간 투자가 위축되고 백신 개발 생태계 전체가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 반론은 일정 부분 타당하다. 그러나 협상의 완성도를 높이겠다는 명분으로 시간을 무한정 끄는 것은, 사실상 현재 체계로 이익을 얻는 주체들이 변화를 막는 전략이기도 하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화이자·모더나 등 주요 제약사들은 백신 판매만으로 2021~2022년 합산 수천억 달러 규모의 매출을 기록했다(각사 연간 보고서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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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개발도상국들은 그 이익의 근거가 된 바이러스 샘플을 제공하고도 백신 접근에서 뒤로 밀렸다. 협상 지연이 누구에게 유리한지를 보면, 반론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드러난다. 한국의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볼 때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한국은 제약 바이오 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으며, 동시에 코로나19 당시 백신 물량 확보에서 고통을 겪은 중간 소득 국가이기도 하다. PABS가 최종 합의되지 않은 채 다음 팬데믹이 발생한다면, 한국은 다시 한번 글로벌 백신 공급망의 불확실성에 노출된다. 반면 한국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PABS 시스템에 재정 기여 주체로 포함될 경우 비용 부담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산업계 일각에서 제기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PABS 시스템이 안착되어야 병원체 정보의 신속하고 투명한 공유가 이루어지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한국 기업들도 더 빠르게 백신을 개발할 수 있다. 공정한 국제 규칙은 한국처럼 기술력은 있지만 협상력에서 강대국에 밀리는 나라에 오히려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준다.

 

2026년 7월 IGWG 7차 회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협상이 타결되지 않는 매일이 다음 팬데믹에 대한 준비 없이 보내는 날이라는 사실이다. 테드로스 사무총장의 경고처럼, 문제는 다음 팬데믹이 올 것이냐가 아니라 언제 오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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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날이 왔을 때 우리가 가진 것이 서명만 된 협정 문서 한 장뿐이라면, 2021년의 혼란은 다시 시작된다. 병원체 공유의 규칙을 지금 만들지 않으면, 다음 위기에서 한국을 포함한 세계는 또다시 규칙 없는 전쟁을 치러야 한다.

 

한국 정부와 산업계가 PABS 조기 타결을 적극 지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Q. PABS 부속서가 없으면 WHO 팬데믹 협정은 아예 효력이 없는가?

 

A. PABS 부속서 없이는 팬데믹 협정이 완전히 발효될 수 없다.

 

협정 자체는 2025년 5월 WHA에서 채택되었지만, 병원체 공유와 이익 배분의 구체적 이행 체계를 담은 PABS가 합의되지 않으면 핵심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 반쪽짜리 협정에 머문다. Q.

 

한국은 PABS 협상에서 어느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A. 한국은 백신 독자 개발 역량을 갖춘 중견 제약 국가인 동시에, 코로나19 당시 백신 확보 불확실성을 경험한 나라다.

 

병원체 정보의 신속한 공유와 공정한 이익 배분이 함께 담보될수록 한국 바이오 기업의 개발 기반도 강화되므로, PABS 조기 타결이 한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한다. Q. 다음 IGWG 회의는 언제 열리는가?

 

A. 정부간 협상단(IGWG) 7차 회의는 2026년 7월 6일부터 17일까지 개최될 예정이다.

 

이 회의에서 PABS 부속서의 핵심 쟁점들을 집중 논의하며, 최종 합의 목표 시한은 2026년 특별 총회 또는 2027년 5월 세계보건총회로 제시되고 있다.

작성 2026.05.04 20:05 수정 2026.05.04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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